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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한비자의 탁족 이야기

알리스슈바 2008. 9. 10. 11:54

(신영복 교수의 나의 동양고전독법:강의  에 나오는 한비자의 글.

책에서 베껴 쓰려고 했는데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글이 있어 가져옴.)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습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습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라리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也        「外儲說左 上」

 

 

신영복 선생 :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兒說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뜻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은 대단한 능변가로서 흰 말은 말이 아니라(白馬非馬)는

변론으로 직하稷下의 변자辯者들을 꺾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흰 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말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