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라고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지금 봄이냐 겨울이냐 정도를 느낌으로 대충 알고, 베토벤의 '합창'을 들으며 성악의 아름다움에 잠깐 매료된 것이 1년전 나의 모습. 최근 1년간 지끔까지의 내 취미 생활 어느 것 보다 깊이 오페라에 빠져 지냈는데, 아직 내가 흠뻑 그 매력을 느껴 본 것이 겨우 10편 남짓 밖에 안된다. 접해 본 것은 훨씬 많지만 별 매력을 못 느낀 것도 많고, 한 오페라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까지 드는 시간이 상당해서 한 편을 대충이라도 아는데 최소 두 세 달은 걸린다. 그리고, 들을수록, 볼수록 더욱 깊은 맛이 있어 질리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취미 생활이 오래가지 못한 것은 집중해서 흠뻑 빠져들어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진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더이상 어려움없이 편안해지면 조금씩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그러다보면 흥미도 조금씩 사그러든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런것인가. 그림도 볼수록, 알수록 전에 모르던 다른 면이 보이고, 때와 장소에따라, 그때의 내 처지와 기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데, 음악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 정서 상태에따라 똑같은 음악의 똑같은 연주라도 달리 느껴진다. 하긴 예술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세상 모든 것이 그런 면이 있기는 하다.
특히, 미술의 경우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 역시 미술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생소하던 오페라라는 음악 장르에 어느날 갑자기 흥미가 생긴 것은 지금은 나도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알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취미를 가지지 않듯이 흥미를 가지고 알려고 노력해도 도무지 매력을 못느끼는 장르가 있게 마련이고, 나도 1년전에는 미술은 몰라도 음악은 나와 전혀 취미가 맞지 않는 장르였다. 지금도 서양의 고음악은 들어도 뭐가 좋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득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된 것은 지난밤 녹화해 둔 오페라를 보던 내게 '그게 뭐가 재밌냐'라고 무심코 묻던 그분(?) 말 때문이다. 평소에도 뚜렷한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 특히나 재미를 들이려면 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오페라를 그가 좋아하리라는 기대는 않지만, 질문 아닌 질문이라도 일단 물음표만 들어가면 대답을 제시해야 하는줄로 아는 나의 이상한 습관상 머릿속에서 대답할 말을 만드느라 한참 고민하고, 결국 내가 한 말은 '음악에 스토리가 있고, 또 그게 악기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매력이다' 라는 것이었다.
사실 연기와 노래, 오케스트라 모두 훌륭한 영상도 있지만, 뭔가 하나 부족한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 나도 가끔은 피식 웃음이 나는 경우도 있다. 전에 한번 그와 같이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를 봤을때도, 그는 연극보다 재미없다는 평가였다. 사실 오페라 무대위의 성악가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고, 오페라가 그것을 주로 추구하는 장르도 아니니 영화나 연극, TV드라마에 익숙한 현대의 우리에게 오페라의 연기는 좀 우스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노래를 해야하는 성악가에게 무리한 연기를 요구하는 연출을 하기도 힘든 것이고. 하지만, 요즘의 영상을 보면 2~30년 전의 영상에 비해 훨씬 연기가 자연스러운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시대의 요구가 아닐까.
안타까운것은 국내 오페라 공연을 보면, 아직도 우리 젊은 성악가들은 전형적인 발성 제스처를 무대위에서 보이고 있다. 옛날 7~80년대 동요부르는 아이들이 누구 할것없이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박자에 맞춰 마주잡은 손을 이쁘게 아래위로 흔들던 것처럼.
오페라가 무슨 재미일까.
오페라는 영상이 아닌 음반으로도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아니, 가끔은 무대 장치나 연기가 배제된 음반이 더 좋다. 목소리만으로도 극적인 상황이 그려지게 노래하는 것이 성악가의 중요한 능력이다. 단지 음표대로 정확한 높이와 세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무대위의 연출이나 연기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게 앞자리를 차지하는 장르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 경우는 처음 줄거리와 각 장면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영상을 보고,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좋은 음반으로 듣는 것이 더 재미있다.
그렇다면 그 알아들을 수도 없는 노랫말은 어떻하나. 이건 간단하다. 가사도 모르고 듣던 팝송을 생각해보라고 말해주면 끝. 가사 몰라도 좋아할 수 있고 또, 또 결국 그 가사 내용 알게된다. 일본 만화에 푹 빠져서 일본어를 자기도 모르게 배워버리는 만화광들은 얼마나 많은가.
오페라 대본의 내용을 100% 알 필요까지야 있나. 알면 더 좋겠지만, 조금씩 단어들이 귀에 들어와서 대충 뭔 소리 하고 있는지는 알게된다.
내게 오페라가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재미있는 것은 세시간이나 이어지는 노래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가요이든 가곡이든 일반적으로 접하는 노래는 길어야 5분정도다. 콘서트는 이런 연속성 없는 노래를 나름대로 잘 배치하고 중간 중간 다양한 양념을 곁들여 1~2시간 흠뻑 빠질 수 있게 해주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오페라는 애초에 하나의 콘서트처럼 만들어져 있고, 노래들이 모두 하나의 스토리안에 잘 짜여져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면에서 다르지만 뮤지컬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일 트로바토레의 한 부분이 흐른다. 사랑하는 여자 옆에서 달콤한 노래를 속삭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와서 외친다. 엄마가 잡혀가서 화형 당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말하고 뛰쳐 나간다. '난 당신의 연인이기전에 한 여자의 아들이오'. 코렐리의 쨍쨍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Di quella pi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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