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담아 들은 오페라가 바로 <아이다>일 것이다. 요즘은 식상해서 매스컴에서도 자주 듣기 힘든 곡이지만 한 20~30년 전에는 참 자주 듣던 곡이 바로 아이다의 개선행진곡. 기억속에 남은 것도 겨우 개선행진곡과 그 거창한 개선장면 정도. 그리고 베르디가 수에즈운하 개통 기념에 즈음해서 의뢰받아 작곡한 것이란 것 정도였다.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이제서야 다시 보게된 <아이다>는 내 기억속, 혹은 여기저기 주워들어서 생긴 막연한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오페라이다. 제목이 아이다이니 일단 아이다란 노예녀가 주인공이란 건 알지만, 라다메스가 부르는 <청아한 아이다>라고 하는 아리아의 유명세 때문에 라다메스가 주인공인가 했더니.. 이거 아무래도 라다메스역은 저기 뒤로 좀 가야겠다.
아이다와 암네리스. 바로 두 여인네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라는 두 나라의 전쟁, 이집트의 개선 장군 라다메스,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 모두 볼거리 있는 배경을 제공하지만 결국 두 여인의 비극적 상황이 이 오페라의 메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매스컴이 나를 아주 속인 것이다. 화려한 전쟁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두 언니의 심리극이다.
인질로 잡혀와 공주의 노예로 있으면서, 적국의 장군과 사랑에 빠진 아이다. 그의 개선은 조국과 아버지의 패배이다, 이런~
장군을 사랑하는 공주 암네리스. 하지만 노예 아이다를 사랑하는 장군, 공주 존심 무너진다, 이런~
<시몬 보카네그라>를 개정판 기준으로 1881년으로 보면, <아이다>는 딱 10년 전에 만든 오페라인데, 시몬 보카네그라에 비해 전체적으로 좀 세련된 맛은 확실히 떨어지고, 아이다보다 더 전에 만든 <운명의 힘>이나 <돈 카를로>에 비해서도 확실히 참신한 느낌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베르디의 작품만을 놓고 작곡한 시기별로 평할 때, 아이다를 시대를 역행한 고리타분한 오페라라고 평하는 의견도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인것 같다. 하지만, 그건 비평가들 얘기이고, 그냥 하나의 오페라를 놓고 즐기는 내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괜찮은 오페라이다.
두 여인의 비극적 이야기를 화려한 전쟁을 배경으로 재미있게 전개하고, 두 여인의 캐릭터도 상당히 생명력이 있다. 남자들의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그런 여자들이 아니라 나름 현실감 있는 존재들이다.
지금도 암네리스역을 하는 돌로라 자지크와 에이프릴 밀로의 폭발적인 공연 실황이 볼 만 하다. 암네리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4막 1장에서의 자지크의 노래와 연기는 숨막힌다. 에이프릴 밀로의 노래는 저음도 힘차고 아름답지만, 고음에서도 힘차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음색이 놀랍다. 그러면서도 드라마틱한 그 절정의 고음이 아주 듣기 좋다. (메트 1988 라이브)
이 오페라의 라다메스역이 그리 빛나는 역할은 아닌지 몰라도 이 실황에서의 도밍고는 별로 빛나지 않는다. 워낙 대단한 두 여자들의 힘에 눌려버린 건가...
전부터 아껴두고 있는 프라이스의 아이다 녹음을 이제 들어야겠다. 정말 고맙게도 라다메스역에 존 비커스도 아주 딱 어울리는 캐스팅 아닌가. 뭐 별 인물도 없고 체구도 자구마한 존 비커스. 그런데 고대의 장군역에 잘 어울린다.
(2010.06.11)
프라이스의 은퇴 공연인 1985년 1월 공연 실황을 보았다. 84년의 <운명의 힘> 공연에서도 그랬지만, 그녀 목소리가 이제 더이상 젊은 여주인공을 하기엔 무리다. 노래 실력이나 그 탁월한 해석은 여전함에도 은퇴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전체적으로 보면 88년 메트 실황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녀의 3막 아리아 'Oh, patria mia' 는 짜릿하다. 노래가 끝나자 2분 넘게 지속되는 관객의 환호 속에서 감정이 격해지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관객을 진정시키는 그녀 모습에 내가 울컥해지려 한다...
1막에서의 '청아한 아이다'는 좀 별로였던 라다메스역의 맥크래켄도 3막에선 숨막히는 2중창을 들려준다.
'음악은 소설일까 > 오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짜르트의 오페라들이 점점 좋아진다 (0) | 2010.11.22 |
---|---|
마농 - 마스네 1884 (0) | 2010.07.02 |
시몬 보카네그라 - 베르디 1881(개정) (0) | 2010.06.04 |
운명의 힘 - 1996 메트 (0) | 2010.05.26 |
몽유병의 여인 - 드세이,플로레즈,페르투시 메트 2009 (0) | 2010.03.10 |